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호법운동 (문단 편집) === 쑨원의 북벌 === 장제스는 아내인 천제루와 함께 1월 18일 계림의 대본영으로 이동했다. 쑨원은 공개적으로 천중밍을 칭찬했는데 장제스는 천중밍을 파직하고 그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쑨원은 장제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에 대한 신뢰심을 키우라고 조언했다. 천제루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제스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 비통하게 통곡했고 1월 19일 아침에는 상하이로 돌아가자고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마음을 추스려 북벌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는 참모총장 [[리례쥔]], 군장 [[쉬충즈]] 등이 참여한 상태였다. 이날 회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 1. 사천성의 군을 동원하여 서북을 평정하고, 제1의 근거지로서 섬서성에서 직예성으로 나온다. * 2. 3개 사단은 호북에서 경한철로로 진격한다. * 3. 광동의 3개 사단은 동남을 평정하고, 난징에서 진포철로로 전진한다. * 4. 기타의 6개 여단은 해상에서 발해만의 진황도에 상륙한다. 1922년 봄 북방에서 환계와 봉계가 연합하여 직계와 싸우는 [[1차 직봉전쟁]]이 발생했다. 쑨원은 1922년 2월, 광저우를 찾아온 [[돤치루이]]의 특사 [[쉬수정]]과 회견하고 [[돤치루이]], [[장쭤린]]과 반직삼각동맹을 결성, 직계를 축출하고 쑨원을 대총통으로, 돤치루이를 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합의를 도출하였다. 쑨원은 1차 직봉전쟁이야 말로 북벌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천중밍은 오히려 직계의 [[우페이푸]], 호남독군 [[자오헝티]]와 연락하는 등 북벌에 반대했다. 하지만 쑨원은 천중밍을 무시하고 2월 3일 북벌을 지시했다. [[리례쥔]]이 강서로, [[쉬충즈]]가 호남으로 출격하였다. 이에 천중밍은 3월 21일 광구철로 대사두 역에서 홍콩에 다녀오던 광동군 참모장 겸 제사단장 등갱을 저격하여 암살했다. 등갱은 북벌자금 모집에 헌신적인 활동을 한 사람으로 북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에 당혹한 쑨원은 3월 26일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호남 공격을 단념하고 대본영을 소관으로 이전하여 강서성 공격에 집중하기로 했다. 쑨원은 천중밍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어 광동성장, 내무부장, 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육군부장 자리만 가지게 하였다. [[랴오중카이]]와 [[왕징웨이]]는 이 결정에 반대하며 천중밍의 직위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쑨원은 묵살했다. 당연히 천중밍은 격노했고 천중밍의 부하인 예쥐가 1만 2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려 천중밍의 복직을 요구했지만 쑨원은 거절하고 5월 4일 다시 북벌을 내리고 5만명의 북벌군을 북상시켰다. 5월 6일 쑨원이 소관의 대본영에 도착했고 전 장병에게 북벌에 관련한 훈시를 하였고 5월 11일 강서성으로 병력이 진공했다. 북벌군은 손쉽게 승리하여 건남, 용남, 남안, 신풍, 남강, 숭의 등을 잇달아 함락시키고 30일에 감주에 이르렀다. 하지만 1차 직봉전쟁이 직계의 승리로 끝나고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쑨원에게 반기를 들면서 이 모든 것이 무소용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